영화

화장 (Revivre, 2014)

Doctrine_Dark 2015. 5. 20. 11:57

 

 

 

 

 


화장 (2015)

Revivre 
7.3
감독
임권택
출연
안성기, 김규리, 김호정, 전혜진, 연우진
정보
드라마 | 한국 | 94 분 | 2015-04-09
글쓴이 평점  

 

 

 

 

 

 

 

 

예술이라는 일이 지닌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단점은 때로 장점으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그 단점을 바꿔 말하면 내가 끝내고 싶을 때 끝낼 수 있다는 장점이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는, 나아가 무언가를 스스로 창조하는 일에는 정년 같은 게 없다. 그래서 다 늦게 새로운 노선을 가겠다고 해도 '정년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막아설 사람도 없다. 예술이라는 분야에서는 그 종사자가 현역이냐 퇴역이냐가 연령대와 같은 외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나의 판단이라는 내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제 갓 30세가 넘은 사람이 퇴역이 되기도 하고, 80세를 훌쩍 넘긴 어르신도 여전히 현역인 곳이 예술계인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할리우드에는 올해 우리식 나이로 86세가 된 현역 영화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있고, 우리나라에는 올해 80세가 된 현역 영화인 임권택 감독이 있다.


절대적인 기준을 두어 비교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비슷한 연세의 두 감독이라는 점에서 굳이 비교를 해 본다면, 임권택 감독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에 비해 자기만의 스타일이 훨씬 공고한 느낌이었다. 늘 전통, 역사, 시대를 바라보는 그의 영화는 연세와도 잘 어울렸고, 그래서 한국영화계를 오랜 세월 이끌어 온 터줏대감 어르신의 느낌이 강했다. 끊임없는 변신과 방향 전환으로 연세를 무색케 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과는 사뭇 다른 행보였던 셈이다. 임권태 감독처럼 이렇게 자신의 스타일이 확실한 감독일 수록 도전에 인색하기 마련인데 올해로 80세, 102번째 영화를 맞아 임권택 감독은 놀랍게도 그 어느 때보다도 눈에 띄는 영화적 도전을 시작했다. <축제> 이후 20년 만에 현재 시점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자, 30여년 만에 현대 도심 한복판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 <화장>이 도전의 결과이다. 그 도전의 결과가 기대만큼 깜짝 놀랄 정도인지는 관객 각자의 판단에 맡겨야 겠지만, 분명한 건 이 영화가 임권택 감독이 여전히 '원로 영화인'이 아닌 '현역 영화감독'임을 입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장품 회사의 홍보마케팅 파트 전무로 있는 중년의 남자 오정석(안성기)은 방금 뇌종양을 앓던 아내 진경(김호정)의 임종을 맞이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어찌된 일인지 슬픔으로부터 너무나 초연해 보인다. 정석의 사회적 지위 덕분인지 장례식장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 와중에도 정석은 회사 간부인 만큼 자신의 결재를 필요로 하는 회사의 서류들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던 중 한때 부하직원이었던 추은주(김규리)가 문상을 온 것을 목격한다. 시간은 거슬러 진경의 뇌종양이 재발한, 아니 새로 생겨난 시점으로 이동한다. 정석은 회사에서도 신사적이고 능력 있는 비즈니스맨이었고, 퇴근하면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남편이자 간병인이었다. 아내를 간호하는 가운데에서도 자신에게 찾아온 나이의 병인 '전립선비대증'을 홀로 힘겹게 버텨내던 중이었다. 그러던 그의 회사에 유능한 마케팅 담당 경력사원인 은주가 들어오고, 정석은 은주의 젊고 당당한 자태에 자꾸만 시선이 간다. 퇴근하면 병약한 아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고, 출근하면 활기가 넘치는 젊은 부하 여직원이 자신을 맞이하는 상황. 그 사이에서 고뇌하는 정석의 마음은 엇나간 연모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화장>은 대작은 결코 아니나 한국 영화계의 거목인 임권택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어쩌면 가장 의미심장한 자리를 차지할 영화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역사나 사건 속의 인물을 주로 다뤘던 임권택 감독이 자신의 경력 사상 유례없이, 큰 역사나 사건과 아무 상관없이 오로지 개인의 심리에만 천착하여 완성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의 대표작인 <서편제> 속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목 위로 흥과 한이 맺힌 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지던 풍경처럼 임권택 감독은 <화장>에서 요동치는 인간의 속마음 풍경을 찬찬히 따라간다. 이 영화가 따라가는 주인공인 오정석 앞에도 그런 길목이 있다면, 그것은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을 위태로운 목숨을 붙들고 있는 아내와 언제든 세상을 휘어잡을 수 있는 화양연화의 시기에 있는 젊은 여인 사이의 길일 것이다. 역사와 시대의 풍경을 비추던 임권택 감독의 카메라는 인간 속내의 풍경도 역시 구구절절 말하기보다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그러다 보니 <화장>은 그리 친절하지 않은 어려운 영화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꾸만 뒤돌아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성찰어린 시선, 복잡다단한 인물의 내면을 우아하게 응시하는 카메라와 배우들의 연기로 인해, 관객 입장에서는 저 사람의 속에 담긴 진심은 과연 무엇이려나, 수 차례 곱씹고 되새겨 보고 싶게 된다.




오정석이 아픈 아내를 놔두고 왜 저렇게 자꾸 젊은 여인에게 한눈을 파는지는 구태여 설명되지도 않고 또 설명되기도 힘든 대목이다. 이성적으로 이것은 부도덕한 불륜, 그것도 죽음을 앞둔 아내를 두고서 벌이는 아주 파렴치한 불륜으로 비쳐질 것이 뻔한 행위다. 그러나 <화장>은 오정석의 번뇌를 앞에 두고 어떤 이성적, 도덕적, 사회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류한다. 아픈 아내를 옆에 두고 젊은 여인을 갈망하는 오정석의 욕망은 파렴치한 성욕이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생욕'으로 비쳐진다. 앞서 설명했듯 오정석은 화장품 회사 홍보마케팅팀의 중역이다. 인간이 외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그것으로 대중을 매료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 그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은 그렇듯 한껏 미와 생기가 가꿔진 여성들의 이미지이지만, 퇴근해 마주하는 것은 한때는 누구보다 똑 부러졌던 아내의 스러져 가는 육체다. 이처럼 한 남자의 삶에서 교차되는 삶과 죽음의 대조적 이미지는 '아름다워 보이게끔 얼굴을 꾸미는 행위'와 '시신을 처리하는 한 방식'을 모두 아우르는 '화장'이라는 제목의 중의적 의미로도 연결된다. 그 자신 또한 전립선비대증으로 앓음으로 인해 예전만큼의 남성성을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된 입장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그토록 손바닥 뒤집듯 가까이 맞닿아 있고 그만큼 '생에 대한 욕구'를 더 간절하게 품게 된다. 영화에서 오정석이 추은주의 젊은 육체를 탐한다기보다 어떤 이상향처럼 동경하는 느낌으로 그려지는 것 역시 오정석의 그러한 욕구가 단지 중년의 불장난 같은 것으로 해결될 수 밖에 없는, 그저 바라보고 꿈꾸는 것 외에는 영원히 충족될 수 없을 것이 빤한 것임을 보여주려는 게 아닌가 싶다.


이는 단지 오정석만이 품고 있는 번뇌가 아니라, 육체가 급격히 쇠해가는 그의 아내 진경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초반에 아주 잠깐 나타나지만 자기 의사 표현이 확실하고 남편 앞에서 당당함을 잃지 않는 진경의 성격은 마냥 유약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미 뇌종양을 앓은 적이 있음에도 육체가 조금 약해졌을 뿐 여전히 도도하게 깨어있는 정신력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랬던 그녀에게 또 한번 닥친 병마는 그녀를 육체적으로 완전히 무릎 꿇게 만들면서, 그녀에게 육체적 고통보다 어쩌면 더 심한 정시신적 고통을 안겼을 것이다.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는 자신의 생에 대한 의지와 자존감이 스러지는 육신에 의해 휘청거리는 것을 뚜렷이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이 수차례 인터뷰에서 가장 손에 꼽는 장면으로 언급한 정석과 진경의 욕실 신은 과감한 노출도 그렇지만 그 노출을 통해 두 사람이 그렇게도 보고 싶지 않아서 애써 피해 왔던 '죽음과 가까운 삶의 초라함'이 끝내는 드러나고 마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과연 인상적인 장면이라 할 만하다.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 앞에서 초라하게 노화하는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끈질기게 생을 갈망하는 인간의 의지는 어떻게 보면 '세월에 맞서 내 본질을 잃지 않으려는 독립적인 행위'로 볼 수도 있다. 내 힘으로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면 세월을 붙잡아 두고서라도 내가 원래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잊고 싶지 않은 절박함의 결과랄까. 그러나 세상은 때로 이런 의지를 '뭐든지 젊고 아름다운 것을 선호하는 얕은 욕망'으로 오독하여 지양하려 하기도 한다. 세상을 떠나는 이를 보내는 방식에 있어 '토지 효율' 운운하면서 매장보다 화장을 권고하는 영화 속 뉴스 대목도 이처럼 '생의 순간을 붙잡아두려는 인간의 원초적 의지'를 '그럴싸한 외적 치장의 욕망'으로 폄하하는 맥락으로 읽을 수 있으리 모르겠다. 이렇듯 위험하고 염치 없을지 몰라도 필연적으로 거부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또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감정이라는 점에서, 정석과 진경이 품은 본래의 삶과 당당한 죽음에 대한 욕망은 슬프다.


임권택 감독은 이처럼 염치와 본능 사이에서 혼란과 갈등을 겪는 정석과 여인들의 모습을 대체로 차분하게 따라가는 가운데 종종 놀라움을 주는 장면들로 관객의 감흥을 새삼스럽게 깨운다. 마음이 요동칠 절망의 순간 앞에서도 차분하기만 한 카메라는 더 이상의 상처 앞에 무감각해진 나이든 마음을 비추는 듯 하고, 일상의 순간 앞에서 오히려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미학적, 성적 이미지가 넘실거리는 장면은 고개를 넘어가는 듯 흘러가던 세월 앞에 갑자기 닥친 생기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중년의 혼란을 그려내는 듯 하다. 임권택 감독이 늘 강조해 온 '사실감'이라는 요소를 통해 이번에는 시대나 역사가 아닌 인간의 마음을 그려내려 한다는 점에서, <화장>이 보여주는 이런 가지각색의 심상은 말하기 전엔 가늠할 수 밖에 없지만 단지 가늠만 하기에 너무나 굴곡진 인간의 마음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일종의 수단일 것이다. 스스로를 너무나 초라하게 만드는 육체의 노화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다가도, 타인이 지닌 생생한 젊음 앞에서는 다시 한번 힘을 내어 꿈틀거리고픈 인간의 고민이 영상을 통해 효과적으로 구현된다. 임권택 감독은 '80세 노인이 만든 영화'라며 스스로 낮추었지만, 그려지거나 잡히지 않는 인물의 심리를 서사로 만들고자 이처럼 다채로운 변화의 이미지를 보여준 것은 분명 이 '80세 노인' 감독으로부터 받기에 너무나 감사한 도전이다.




사건이 아닌 심리가 이처럼 사실감을 획득하는 데에는 배우들의 연기도 큰 몫을 한다. 아내와 젊은 여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 오정석 역의 안성기 배우는 빈번한 클로즈업 앞에서 말보다 눈빛과 표정으로 더 많은 연기를 하며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부끄러움과 죄책감, 죽음 앞에서 당당하고픈 마음과 생에 대한 갈증을 함께 품은 그의 연기는 단 몇 초의 주름진 표정마저도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되고, 그림이 된다. 이와 함께 오정석의 아내로 죽음을 코앞에 둔 여인 정진경 역의 김호정 배우의 연기는 가히 필견 수준이다. 역할을 위해 수위 높은 노출도 불사했지만, 그녀의 절박한 연기로 인해 그것이 자극적으로 소모되기는커녕 오히려 숙연한 품격을 갖춘다.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는 육체의 고통, 그리고 그 안에 갇혀 육체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 내면 속 생에 대한 의지를 눈물겹게 표현한다. 안성기, 김호정 배우의 이러한 호연이 균형있게 펼쳐지면서 <화장>은 단지 한 남자의 성적 욕망을 두둔하는 영화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아프고 위험하고도 보편적인 의지를 이야기하는 영화가 된다. 한편 오정석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여인 추은주 역의 김규리 배우는 오정석의 눈길을 빼앗을 만한 당당한 아름다움과 에너지를 한껏 과시한다. 다만 이 영화에서 은주는 정석에 의해 철저히 타자화, 대상화되는 인물이다 보니 세상과 인물에 대한 소통보다는 일종의 표상 역할에 머무는 편이다.


<화장>이 보여주는 이야기나 형식이 사실 겉보기에 그렇게까지 혁신적이거나 충격적이거나 대담하진 않을 수 있다. 그러나 80년의 영화인 생활동안 자신의 고착화된 스타일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았던 '현역 노장' 감독이 세월에 아랑곳없이 보여주는 도전이라는 점에서 <화장>은 충분히 의미심장한 위치에 설 만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임권택 감독은 필모그래피 사상 거의 처음으로 시대와 역사보다 사람을 더 깊게 들여다 보지만, 경험해온 바와 살아온 세월이 그에게 선사한 연륜과 경륜은 '처음'이라는 핸디캡마저도 무력화시키기에 충분하다. 오히려 비단 한 나라와 민족이 거쳐 온 시간 뿐만 아니라, 작은 개인이 맞이하는 찰나 속에도 구구절절한 역사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화장>은 더 내밀한 시선으로 더 광활하게 임권택 감독의 영화세계를 확장하는 이정표가 된 것 같다. 여전히 다음 작품이 궁금한 할리우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처럼, 임권택 감독의 다음 작품도 여전히, 아니 더 많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