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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보도] 메이저리그, 혹사의 기준에 답한다

Doctrine_Dark 2016. 9. 23. 00:10





전설적인 감독 토니 라 루사(사진=gettyimages / 이매진스)전설적인 감독 토니 라 루사(사진=gettyimages / 이매진스)

 

1845년경 은행 직원이자 자원봉사 소방수였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근대 야구 경기의 규칙들을 창안했을 때, 야구는 9명이 하는 스포츠였다. 지금도 필드에 9명이 있는 건 다르지 않다. 다만 당시에는 '문자 그대로' 9명이었다.

 

선발 투수는 그날 경기를 온전히 책임지면서 타석에도 들어섰다. 1884시즌 찰리 래드본은 75경기에 나서 678.2이닝을 던지며 59승 12패를 거뒀다. 현대 야구에선 이해하기 어려운 등판 일정이지만 당시엔 드물지 않은 기록이다. 1884년 이전까지 투수들은 오로지 언더핸드스로로만 던질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론 투수들이 팔을 어깨 위로 치켜들어 던지기(오버핸드스로) 시작했으나, 여전히 괴악스럽게 많은 이닝을 던질 수 있었던 건 데드볼(반발력이 죽은 공)을 썼기 때문이다. 공의 가죽이 찢어지더라도 완전히 망가지지만 않으면 계속 사용해야 했다. 지금처럼 홈런이 나올 리가 없었다. 따라서 전력투구를 할 일도 없었고 연투를 밥 먹듯이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1914) 이후 베이브 루스의 등장으로 라이브볼 시대가 열렸고 홈런이 폭증하면서 투수들은 일 구 일 구에 신중을 기해 전력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규칙이 바뀌고 리그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투수들은 점차 '쎄게' 던질 것을 요구 받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완투가 점차 드문 일이 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선발 투수의 등판 간격도 점차 벌어졌다. 

 

그러면서 생긴 빈자리를 메운 게 구원 투수들이다. 세이버메트리션이자 야구사 전문가이기도 한 빌 제임스는 최초의 전문 구원 투수이자 마무리 투수로 1920년대에 워싱턴 새너터스에서 활약했던 퍼포 마버리(551경기 186선발 99세이브 ERA 3.63)를 꼽았다. 이후 1940년대가 되자 마무리 투수를 기용하는 팀이 늘어났고, 세이브(Save)라는 기록이 생겼다.

 

하지만 당시 마무리 투수들은 지금처럼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마지막 1이닝을 막아내는 역할만 맡은 건 아니었다. 단적으로 1974시즌 마이크 마샬은 구원 투수로만 106경기에 등판해 208.1이닝을 던졌다(15승 12패 21세이브 ERA 2.42). 현대적인 개념의 마무리 투수 개념을 정립한 건 전설적인 감독 토니 라 루사로 알려져 있다.

 

이 변호사 출신 감독은 시카고 화이트삭스에서 해고된 후 1986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1988시즌 선발투수론 한물갔지만 구원투수로선 꽤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는 한 투수를 '이기는 경기에서 거의 9회에만' 던지게 했다. 그 투수 데니스 에커슬리는 60경기에 나서 72.2이닝 45세이브 평균자책점 2.35를 거두며 사이영상 투표에서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팀 내 최고의 구원 투수를 1이닝만 던지게 하면서 생긴 공백을 '좌타자 전문 구원투수', '셋업맨'을 비롯한 다양한 보직을 만들어내며 메웠다. 현대 야구 투수진 운용에 있어 정석이라 할 수 있는 라 루사이즘의 등장이다.

 

뉴욕 메츠의 선발 투수 노아 신더가드. 이젠 선발 투수도 평균 98마일(157.7km/h)를 던지는 시대다(사진=gettyimages / 이매진스)뉴욕 메츠의 선발 투수 노아 신더가드. 평균구속 98마일(157.7km/h) 패스트볼을 던진다.(사진=gettyimages / 이매진스)

 

# 라 루사이즘이 등장하기까지 투수들의 분업사를 간략하게나마 짚어봤다. 야구란 스포츠의 절반을 차지하는 피칭(Pitching)의 역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더 강하게'와 '더 나눠서' 이 두 마디로 거의 전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투구의 본질은 27아웃(연장 제외)을 잡아낼 때까지 최대한 적은 실점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타격 기술이 점차 발전하고 타자의 평균적인 수준이 높아지면서 투수들은 점차 '전력투구'를 해야만 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투구는 인체 구조상 매우 부자연스러운 동작(야구란 무엇인가: 레너드 코페트 저)'이라는 점이다.

 

강하게 던지면 던질수록 한계는 빨리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선발 투수의 평균은 점차 줄어들고 구원투수들이 각각 맡은 역할에 따라 차례로 등판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투수 분업화의 본질적인 이유는 인체의 자연스러운 구조에 역행하는 투구 동작으로 받은 신체적인 부담에서 투수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즉, 현대 야구에서 투수 분업화는 단지 한 경기 내에서 실점을 줄이려는 방편일 뿐만 아니라, 한편으론 과거에 비해 신체적인 부담에 더 노출된 투수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탄생했고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종종 예전 투수들의 강인함에 대해서 칭송하면서 현대 투수들의 나약함을 꾸짖는 글을 목격한다. 그 옛날 월터 존슨이 던진 공에선 칙칙폭폭 하고 기차 소리가 들렸다는 증언이 인터넷을 떠돌다 국내에 상륙했던 적이 있다. 그렇게 빠른 공을 던지면서도 완투를 밥 먹듯이 했고 300이닝 30승을 달성했다는 전설이다.

 

최근에는 랜디 존슨이 100마일을 밥 먹듯이 던졌다는 글도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보인다. 월터는 못 봤으니 할 말이 없어도, 랜디는 봤다. 기록도 남아있다. 랜디의 최고 평균구속은 2002시즌 기록한 94.1마일(151.4km/h)이다. 그 이전엔 기록이 없고, 전성기엔 더 빨랐으리라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역 좌완 평속 1위 제임스 팩스턴(97.2마일)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2016시즌 현재, 2002년 압도적인 평균 구속 1위였던 랜디보다 높은 평균구속을 기록하는 투수만 32명이다. 결코 랜디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다. 기자는 야구를 본 이래로 모든 투수 가운데 랜디를 제일 좋아한다. 다만 현재 투수들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게' 공을 던지고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하단에 첨부한 표를 보면 이런 사실이 더욱 명백해진다.

 

Pitch f/x 자료가 제공되는 2002시즌부터 2016시즌까지 메이저리그 투수 패스트볼 평균구속 변화와 토미 존 수술을 받은 선수의 증가(자료=팬그래프닷컴, MPA)Pitch f/x 자료가 제공되는 2002시즌부터 2016시즌까지 메이저리그 투수 패스트볼 평균구속 변화와 토미 존 수술을 받은 선수의 증가(자료=팬그래프닷컴, MPA)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2002년부터 2016년까지 메이저리그의 평균 구속은 3.3마일(5.3km/h)이 올랐다. 2007년(0.2마일 하락)을 제외하곤 말 그대로 '꾸준히' 상승했다. 그러면서 동반 상승한 게 토미 존 수술(팔꿈치) 집도 횟수다. MPA(메이저리그 선수 연구회)에서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1974년 토미 존이 최초로 수술받은 이래 2001년까지 27년간 203건이었던 수술 횟수는, 2002년 이후 15년간 1113건으로 5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2012년 들어서부턴 연간 100여 명의 마이너리그/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수술 받는 실정이다. 이는 의학의 발전으로 인한 검진율 증가 그리고 재활 성공률 증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현대 투수들이 과거보다 더 큰 신체적 부담에 노출되어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이쯤 되면 일부 독자들은 '완급 조절'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평균 93마일(149.7km/h) 패스트볼에 익숙해진 타자들에게 일부러 구속을 낮춰서 던지라는 건 무리다. 현대 메이저리그 타자들에게 90마일 패스트볼은 (그 공을 던지는 투수에게 특별한 공 끝이나 숨김 동작이 없는 한) 그야말로 '밥'이다.

 

2016년 90마일 이하의 패스트볼을 상대로 가장 많은 안타를 기록한 타자는 보스턴 유격수 젠더 보가츠로 75개의 안타를 쳐냈다. 반면 90마일 이상 패스트볼을 상대로 가장 많은 안타를 기록한 워싱턴 2루수 대니얼 머피는 고작 22개를 안타로 만들어내는 데 그쳤다. 실정이 이러니 투수들은 타자들에게 빠른 공을 던지라고 강요 받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두산 베이스에서 뛰기도 했던 스캇 프록터는 현재까지 메이저리그 최후로 불펜 100이닝을 돌파한 선수기도 하다(사진=gettyimages/이매진스)두산 베이스에서 뛰기도 했던 스캇 프록터는 현재까지 메이저리그 최후로 불펜 100이닝(2006시즌, 뉴욕 양키스)을 돌파한 선수기도 하다(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이제 우리는 현대 투수들이 받는 신체적인 부담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분업화 역시 심화되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언뜻 보면 별 상관이 없어 보이거나 인과관계를 뒤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더 강하게'와 '더 나눠서'가 현대 야구 투수진 운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해서 정립된 현대 야구 투수 운용의 상식은 다음과 같다. 

 

1. 선발 투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5인으로 구성되며 순서대로 닷새에 한번씩 등판한다. 

2. 마무리 투수는 보통 9회에 3점차 이내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나, 동점 상황에서 등판한다. 

3. 셋업맨은 보통 마무리 투수와 같은 조건에서 8회에 올라온다. 

4. 좌완 스페셜리스트는 9회를 제외한 경기 후반 결정적인 순간에 좌타자를 상대로만 나온다. 

5. 롱 릴리프는 선발투수가 일찍 무너졌을 때와 같이 긴 이닝이 필요한 상황에 등판한다.

6. 스윙맨은 하위 선발 로테이션이나, 롱릴리프의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는 보직이다.

7. 나머지 투수들은 각각이 갖는 특성에 맞춰 상황에 맞게 기용되는 식이다. 

 

그런데 투수들이 받는 신체적인 부담에 있어 맡은바 보직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요소가 있다. 바로 등판 간격이다. 선발 투수들의 경우엔 건강 유지법에 대한 노하우가 쌓이고, 전체적인 투수층이 두꺼워지면서 등판 간격이 일정해졌다. 전설적인 감독 화이트 허조그 시대 이후론 5인 로테이션이 정석이다.

 

선발 투수는 선발 등판을 마친 후 이틀간은 연습 피칭을 하다가(첫날 온전히 쉬기도 한다), 사흘째 되는 날엔 공을 거의 만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리고 나흘째는 불펜 투구를 갖는다. 이런 식으로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시즌 종반까지 투수들의 건강을 유지하고 선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무리 투수를 제외한 구원 투수들의 등판은 종잡을 수가 없다.

 

구원 투수들은 메일이라도 등판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등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불펜에서 대기할 때 연습 투구를 던진다. 어쩔 땐 며칠간 불펜에서 대기하며 던진 투구수만 3이닝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이 때문에 구원 투수의 선수 수명은 선발 투수보다 짧은 편이다. 그러니 적어도 2연투나 3연투를 한 다음엔 적어도 하루 이상은 쉬게 해줄 필요가 있다.

 

물론 메이저리그에서도 감독이 이런 참을성을 발휘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라 루사이즘 이후 해마다 구원 투수 최다 이닝이 줄어들었으나,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구원투수로서 1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들이 간간히 있었다. 하지만 2006시즌 '토레의 남자' 스캇 프록터(당시 뉴욕 양키스) 이후부턴 더는 구원투수로 100이닝 이상을 단진 투수는 없었다.

 

마리아노 리베라와 트레버 호프먼을 위시한 '슈퍼스타' 구원 투수들의 등장은 바로 이처럼 점점 구원 투수들의 보직이 철저히 분업화되고, 연투와 투구이닝이 줄어들면서 '롱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스타 구원 투수의 탄생은 점차 셋업맨 보직으로도 확대되는 추세다.

 

김민우 2015 투구일지. (그래픽=MBC SPORTS+ 야시장)김민우 2015 투구일지. (그래픽=MBC SPORTS+ 야시장)

 

# KBO리그에선 지난해부터 혹사 논란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구원 투수로만 등판해 80이닝을 넘긴 투수만 5명이다. 산술적으로 144경기인 KBO리그에서 80이닝이면, 메이저리그에선 90이닝이다. 게다가 팀 숫자도 10개 대 30개니 메이저리그로 치면 15명이 90이닝을 넘겼다는 얘기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구원 최다 이닝은 델린 베탄시스의 84이닝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지난해에만 각각 112이닝, 96이닝을 던졌다는 한화 이글스의 권혁과 박정진은 메이저리그의 70년대를 연상케 하는 수준이다. 올해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한화 권혁과 송창식은 각각 95.1이닝과 94.0이닝을 던졌다. 메이저리그와의 수준 차이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 성적에 따라 감독이 압박받는 정도가 다르고, 전체적인 투수진의 풍부함이 다르다.

 

그러나 2014년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2014년 구원 이닝 1, 2위는 SK 전유수와 삼성 차우찬으로 각각 84.2이닝, 82.0이닝에 그쳤다. 경기수가 16경기 늘어났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쉽사리 납득 가능한 상승 폭이 아니다. 모두 한 감독이 복귀하고부터 일어난 일이다. '상식 밖의 구원 이닝'을 기록한 투수들도 모두 그 감독이 복귀한 팀에 속해있다.

 

8월 22일 ‘엠스플뉴스’가 고졸 2년 차인 한화 김민우의 어깨 부상 소식을 전했다. 김민우는 지난해 막판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강행군을 벌였다. 소속팀 감독은 투수 혹사 논란에 대해 "도대체 혹사의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2년간 구원 투수로서 207.1이닝을 던진 권혁이 팔꿈치 부상으로 1군에서 제외됐다.

 

메이저리그 혹사의 기준은 앞서 말한 대로다. 메이저리그는 투수진이 철저히 분업화되어 있으며, 감독은 보직 파괴를 일삼지 않는다. 선발 투수 로테이션을 가급적 지키려 노력하고, 필승조는 대체로 이기는 경기에서만 쓴다. 3연투 이상은 자제하고, 롱릴리프를 제외한 구원 투수들은 될 수 있는 대로 멀티 이닝을 소화하지 않는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투수진의 건강을 유지하고, 선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 메이저리그 감독과 프런트가 수십 년간 쌓아온 노하우다.

 

김성근 한화 감독이 질문한 “혹사의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겠다. 지난해와 올 시즌 김 감독의 투수진 운영이 바로 혹사의 기준이다.  

 

엠스플뉴스 탐사보도팀

이현우, 박동희, 배지헌, 김원익, 전수은, 김근한 기자 hwl050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