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아주 심각하다.
대전 중구에서 시작된 향정신성 야구가 급속도로 유포되고 있다.
좀 쉬어야 할 일요일 밤에도 늦게까지 상영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날 출근해야 할 직장인들, 학교 가야할 애들까지도 도대체 헤어나올 수가 없다. 심장을 터질듯하게 하고, 비명과 알 수 없는 헛소리를 내지르게 만드는 마약 야구의 전국적인 확산에 관계 당국은 비상이 걸렸다.
유한준의 3점 홈런. 그리고 0-6. 저녁 6시 무렵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3연패. 스윕. 8위. 무너지는 5할 승률. 그건 마치 주식 시장에서의 심리적인 지지선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지켜야 하는, 한번 쓰러지면 걷잡을 수 없으리라는 막연한 불안감. 역시 DTD는 불변의 진리인가.
하지만 그들은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했다. 법정 근무시간을 초과해 가면서 0-6을 7-6으로 바꿔놨다. 그 힘겹고, 애절한 경기는 수많은 접근법으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오늘 제시하는 관점은 '번트'다. 그 소박하고, 알량한 공격법이 어떻게 그토록 거대한 절망을 이겨내도록 했는가. 그들이 파고 든 아주 작은 틈 속으로 들어가 본다.
8회말 2점차의 이상한 보내기 번트
8회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기 전 스코어는 4-6이었다. 첫 타자 강경학이 내야안타로 살아나갔다. 여기서 (야구 좀 안다는) 모두의 눈을 의심케 하는 작전이 나왔다. 희생 번트(9번 송주호). 물음표가 100개쯤 생기는 대목이다. 왜? 그래서 뭘 어쩌려고? 1점 낸다치자 그 다음엔 뭐? 9회엔 손승락이 있는데? 1점 지나, 10점 지나 아닌가?
그 대목은 당연히 강공이어야 했다. 송주호가 빠른 좌타자니 쉽게 병살 당하지도 않을 거고, 영 못 미더우면 대타를 쓰든가. 어쨌든 공격 기회가 2번 밖에 안 남았는데, 택한 작전치고는 심히 마땅치 않았다.
과연 여기서 야신은 무슨 수를 읽었을까. 그는 조상우가 7회가 넘도록 불펜이 아닌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체크했다. 스파이크가 아닌 운동화 차림이었다. 즉 그의 등판은 없다는 뜻이다. 연장으로 가면 (승리)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는 말이다.
문제는 손승락이다. 그런데 그는 금요일 13개, 토요일 17개를 던지며 연투했다. 나오면 3연투다. 아마 1점차라면 압박감이 훨씬 클 것이다. 1점을 뽑고, 9회초를 지우면 된다. 물론 이 경우를 대비해 권혁을 준비시켰다.
이용규의 번트는 어떻게 기획됐나
그리고 진짜 비장의 한 수. 바로 이용규의 번트다. 그의 타석이 되자 넥센은 작정한 시프트를 썼다. 2루수와 유격수가 마치 오른쪽 타자를 맞는듯한 포메이션이었다. 이건 그의 좋은 타구가 대부분 좌익수 쪽으로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경우 1루쪽 푸시 번트에 약점이 생길 수도 있는데, 박병호(1루수)와 김지수(2루수)의 능력이면 충분히 커버한다는게 염갈량의 계산이었다.
<그림1> 이용규 타석에 넥센 내야 시프트. 유격수와 2루수 위치를 주목해야 한다. KBS N스포츠 중계화면 캡쳐
하지만 이용규가 택한 코스는 넥센이 함정을 파놓은 1루쪽이 아니었다. 반대로 가장 철저하게 마크된 3루 쪽이었다(정확하게는 투수와 3루수 사이). 이용규는 초구에 번트를 시도해서 파울이 됐다. 아마 이 과정에서 상대 내야진의 움직임을 포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세한 틈을 발견했다. 다음 과정들은 왜 그런 틈이 생겼느냐에 대한 설명이다.
① 3루수(윤석민)는 번트 모션이 나올 경우 일단 파울 라인쪽을 향해 스타트한다. 대부분 살고자하는 번트가 그쪽이고, 조금 안쪽이라해도 잡아서 1루에 던지기 편한 동작이 되기 때문이다.
② 투수는 이상민이었다. 투구 동작 후 3루쪽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좌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넥센은 1루쪽 기습 번트에 대한 대비를 많이 하고 있었다. 실전에서도 이상민은 첫 스텝이 1루쪽이었다. 이말은 오히려 3루쪽이 역방향이었다는 뜻이다.
③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유격수(김하성)의 움직이었다. 그는 번트가 나오자 서둘러 2루로 들어가려 했다. 2루수는? 1루수 뒤로 갔다. 1루 송구가 빠질 때를 대비한 백업이다(우익수는 우중간에 있었다). 때문에 텅 빈 2루 베이스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지배했다. 결국 가만히 있었으면 정면 타구였지만, 오히려 텅 빈 자리가 됐다.
정리하면 이렇다. ①과 ②의 요인 때문에 3루수와 투수 사이에는 틈이 생겼다. 그 사이로 강하게 굴려준 번트는 '사라진 유격수'의 공백으로 파고 들었다. 결국 1사 2루의 번트 안타는, 강하게 친 좌전 적시타와 똑같은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물론 이게 우연일 리는 없다. 캠프 때부터 꾸준히 준비한 여러가지 묘수풀이 중 하나일 것이다. 여기에 이용규의 감각, 그리고 야신과 그 스태프들의 치밀한 관찰과 분석의 결정체였으리라.
<그림 2> 유격수는 이용규의 번트 때 2루 베이스를 들어가느라 타구를 따라가지 못했다. KBS N스포츠 중계화면 캡쳐
치명적 번트 능력이 제공한 밀어내기 기회
적의 폐부를 찌른 8회 기습은 이 경기를 끝까지 지배했다. 클라이맥스인 10회말로 가보자. 1사 2, 3루가 됐다. 권용관 타석. 히어로즈 벤치는 고의 4구를 지시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결국 이게 패착이었다.
그들은 왜 베이스를 채워 (밀어내기의) 위험 부담을 안았을까. 권용관-허도완이면 충분히 승부할 타순이었는데. 권용관이 2안타여서? 하지만 그 2개는 정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위기를 강경학까지 가게 해서는 안됐다. 그는 3안타를 친 것뿐 아니라 매 타석 투수를 힘들게 하던 까다로운 존재였다. 그런 타자를 끝내기 만루 상황에서 승부해야 하는 것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였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염갈량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베이스를 채웠다. <...구라다>는 그걸 스퀴즈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본다. 사실 짜내기는 공격 쪽에서도 위험부담이 크다. 반대로 수비 쪽에서 함정을 파놓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권용관과 승부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만한 선택지였다.
그러나 야신들은 올해 몇 차례나 짜내기를 성공시켰다. 게다가 며칠 전 똑같은 상황이 있었다. 1사 2, 3루에 권용관 타석. 여기서는 최고라는 삼성 내야진도 당했다. 때문에 넥센은 작전의 변수를 최소화 하는 만루가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야신은 이미 '됐다'고 확신했을 지도 모른다.
바늘 하나도 절대 고수에게는 필살기로
번트는 야구가 가진 모든 공격 기술 중에도 가장 홀대 받는 분야다. 그리고 그에 대한 논란은 예나 지금이나 지루하게 계속 된다. 효과적이냐 아니냐. 재미있냐 없냐. 인간적이냐 비인간적이냐.
서극 감독의 오래 된 영화 <동방불패 東方不敗>는 이연걸이 주연이었다. 그의 숙적은 강호를 제패한 동방불패(임청하)다. 그(녀)의 무기는 바늘이다. 여염집 반짇고리에나 있을 법한 가늘고 작은 평범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하찮은 것도 무림 절대고수의 손에서는 치명적인 필살기가 돼 버린다.
어쩌면 야신의 번트가 그런 건지 모른다.
상기 원문은 '백종인의 야구는 구라다'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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