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집결호(集結號, Assembly, 2007)

Doctrine_Dark 2015. 6. 12. 23:14







집결호 (2008)

Assembly 
6.6
감독
펑샤오강
출연
장한위, 등초, 원문강, 탕연, 요범
정보
전쟁, 드라마 | 중국, 홍콩 | 125 분 | 2008-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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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감정선을 흔드는 기술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만만치가 않음을 이 영화도 그런대로 잘 보여준다. 원래 선전술에 능하고 돋보기처럼 집중선으로 통합되는 과잉의 내면을 강요적으로 요구하는 내속사회인지라 그 부분이 유난히 기능적으로 발달되었겠지만 이 영화처럼 그 의식적 내용도 노골적인 원색선을 살짝 흐리며 인간주의를 더해주면 괜챦게 넓은 시장을 확보하는 것도 가능해 지는 것이 우선 인상적이다.

 

어떤 국가주의적 전체주의의 포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필름이 절제와 회색이 배어나는 이런 일말의 공백과 여유를 편하게 마련하게 되는 것은 결국 사회주의가 무대에서 비껴나고 있는 정치적 거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 편한 거리는 미국과 동맹한 서울의 영화관에 앉아 있는 나 같은 한 소시민에게도 그 거리의 여백만큼이나 좋아 보인다.

 

우선 쥔장은.. 사실적인 그림을 쏟아놓는 피 튀기는 전쟁영화가 좋다. 일본음식들처럼 말랑말랑한 맛과 2차색, 잘 다스려 진 톤들의 도회적 감성, 문화적 시선에 몰려 끝없는 위장과 변복을 하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도 때로는 싫증이 날 때 내안의 짐승같이 거세당한 채 잠복하고 있는 폭력적 거인에게 몸이 찢어지고 피가 터지는 원색의 그림들은 숨이라도 쉬게 하는 틈새요 유쾌한 리듬의 통풍구로 경험될 수도 있다. 몇 년 전인가 날 도끼를 휘두르며 연쇄 쿠데타를 일으키던 고려 무인들의 난동을 다룬 TV사극,<무인시대>를 그래서 재밌게 보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소년처럼 폭력게임에 몰두하거나 어떤 심리적인 문제에 빠져 폭력물을 주기적으로 필요로 하는 치 일리야 없지만 가끔은 이런 영화와 같이 예기치 않게 일상에 침범하는 전쟁영화는 그냥 외면하지 않고 편하게 보는 편이다. 원래 소심하고 내성적인 기질인지라 그 다스려진 수평에 대한 일말의 보상으로도 때로는 수직으로 찌르는 간접의 자극에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전쟁이야말로 인간의 권력과 힘, 욕망, 본성적인 파괴본능이 원초의 외설로 분출되는 진정한 인간의 심해저가 아닌가? 80년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월남전 영화 <플래툰>을 그래서 나는 내 발로 표를 사서 세 번을 반복해서 본 개인사를 간직하고 있다. 내안의 숨은 본능을 만져주고 거기에다 휴머니티를 괜챦게 더빙해주면 나는 그냥 무장해제를 당해 버린 채 그 영상의 흐름에 내 내면을 흘려버린다. 폭력을 즐기는지 인간애를 즐기는지 아니면 그 극단의 대칭에서 양자를 더 반사적인 돋을새김으로 투과하는 신비의 실루엣들을 향유하고 있는지 구분이 안가지만 어쨌든 전쟁의 폭력과 눈물의 조합은 내가 익히 좋아하는바 그대로이다.

 

영화는 우선 공산주의자들의 자존심들이 일정한 공백으로 스며들어 일말의 푸근함을 느낀다. 그들이야말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묻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이유가 분명할수록 그들은 체제의 한 부품으로도 쉽게 내려앉을 수 있고 전쟁의 참호 속에서도 쉽게 동료의 동지가 되어 포탄을 짊어지고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수평의 유기에서 동무이니 동지이니 하는 소통호칭들은 그렇게 해서 촉발되고 호출되어 신경조직처럼 편하게 유통된다.

 



 

무엇이든 항상 일정하게 모자라는 미함량, 철모도 위험지역에 노출된 분대를 중심으로 돌려가며 쓰고 국민당의 미국제 대포와 탱크에 맞서 조악하게 급조한 야포로나 산탄포, 아니면 몸으로도 달려들어 불을 질러대야 하는 판이다. 잉여 대 미함량, 그 미함량분은 인간으로 육화된 끈끈한 정의감과 서로간의 예의와 신뢰를 불러들인다. 해방군의 중대장 구디지는 부하들에게 양보하느라 철모를 한 번 쓰지 못하고 살육의 현장에서도 죽은 전우는 주검이라도 반드시 생명처럼 챙긴다. 그 존재감에 부하들은 (유령같은) 명예를 지켜 준다는 서로간의 존재론을 담보로 화염병을 들고 상대방의 화약고에 뛰어들 수 있다. 그들에게 핍절은 이렇게 불편하지만 인간을 불러내는 소중한 번식공간이다. 자기확신과 인간을 그만큼 밀어내는 잉여와의 대립에서 이 미함량은 블랙홀처럼 휴머니티를 빨아들여 밀도 깊게 팽창시킨다. 낮은 자의 공백이, 타자로부터 부여된 잉여와 초과를 이기는 것은 이렇게 처음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인민해방군의 핍절공간에서 엉겨 붙은 인간미의 인간이, 코기토를 축으로 유아적 우주론으로 발산되는 자유와 주체로서의 인간이 인간이냐? 아니냐?는 소비자의 판단 몫이지만---) 이런 공백의 그림들이 흑백에 가까운 칙칙한 영상 속에서 흘러나와 스며드는데 그 솜씨가 그렇게 제법 촌스럽지가 않다.

 

좀 유치한 비약이지만 영화가 보여주는 이 60년 전의 인간들의 군상에서 지금의 주룽지도 보이고 후진타오, 국가개조를 수행하는 중국의 지도부들의 진중한 얼굴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저 시신 옆에 내 자리도 비워 놓고!”

“이 폐광을 다 파내더라도 동지들의 시체가 발굴되지 않으면 내 몸을 거기에 묻으시오!”

 

혼자 살아남은 중대장 구디지!(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예의 그 인간미로 한국전쟁에서 오래된 친구를 얻고 전쟁 후에서는 온갖 오해와 수모를 당하면서도 동지로 죽어서 실종된 47인의 부하들을 발굴 복권시키는 전쟁을 수행한다. 마침내 당은 실체를 알게 된 그들에게 혁명열사로 추대하고 그들의 이름 앞에 비장한 예포를 쏘아 올리는데---.

 

사실 위치가 완전히 전복된 형태의 국가주의류의 영화는 나에게는 이번이 처음이다. 인민해방군의 시각에서의 중국내전, 한국전쟁--- 이 역으로의 유쾌한 자극과 흥미만으로도 이 영화는 우리 앞에 설만하다. 민족이니 동지니 하는 신성한 담론들이 그 신성한 유령처럼 존재의 신비를 흡수하는 폭력들은 우리가 들뢰지안이 아닐지라도 누구나가 인정할 수 있는 이념(철학)이후의 지금인 만큼 반대편의 중국의 국가주의도 이제는 서울에서도 충분히 유희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다만 그 참호 속에 내가 있었고 애타게 기다리는 집결호, 후퇴를 지시하는 나팔소리는 나에게도 들려져야 할 반가운 음향일 뿐이다)

 

영상미도 괜챦고 스토리의 전개 구성미도 작년 부산영화제의 개막작에 오를 정도의 격은 갖춘 것으로 보인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제작팀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는 전쟁씬들도 익숙한 듯 리얼한데 찍은 미술적 구도미는 확실히 스승을 능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