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당신이 몰랐던 '선수' 슈틸리케

Doctrine_Dark 2015. 11. 15. 21:21

61년 전 오늘 태어난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의 선수 시절을 되짚어 보는 시간입니다. 두 번째 편에서는 슈틸리케 감독의 레알마드리드 시절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 봅니다.


슈틸리케의 레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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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마드리드 월간 잡지, 1977년 9월호 표지로 나선 슈틸리케


■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직접 택한 선수


레알마드리드에 수 많은 레전드가 존재하지만, 홈 경기장에 이름이 헌정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를 능가할 이는 아무도 없다. 베르나베우는 선수와 코치, 감독을 거쳐 회장직에 이르기 까지 평생을 레알에 헌신한 인물이다. 베르나베우는 1909년, 만 14세의 나이로 레알 유소년 선수로 뛰었다.


경기장 건설 공사에도 직접 참가한 베르나베우는 1군 팀의 주장으로 활약한 공격수였다. 1927년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는 지도자의 길을 걸었고, 1943년부터 1978년까지 회장을 맡았다. 이 시기 레알은 스페인과 유럽 무대를 휩쓸었다. 베르나베우는 1978년 6월 2일 숨을 거둘 때까지도 레알에 모든 것을 바쳤다.


베르나베우가 레알에 안긴 마지막 선물은 ‘리베로’의 대명사인 울리 슈틸리케다. 그가 죽기 1년 전, 그리고 회장직에서 물러나기 1년 전. 여전히 전력으로 일에 몰두했던 베르나베우는 레알의 중원에 혈기왕성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접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의 적임자를 찾아 나섰다.


먼저 레이더망에 오른 선수는 보루사이묀헨글라트바흐에서 뛰던 독일 대표 선수 라이너 본호프였다. 베르나베우 회장은 자신의 오른팔인 아구스틴 도밍게스와 함께 직접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독일로 향했다. 본호프는 전형적인 박스 투 박스형 미드필더였다. 쉬지 않고 공격과 수비를 오르내리는 플레이로 주가를 높이던 선수다.

 

본호프는 1978년에 스페인으로 향했는데, 그의 행선지는 레알이 아니라 발렌시아였다. 베르나베우 회장이 본호프를 보러간 경기에서 다른 선수에게 푹 빠졌기 때문이다. 베르나베우 회장은 VIP 발코니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옆에 앉은 도밍게스는 목표 선수인 본호프의 플레이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본호프가 레알에서 뛴다면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하며 유심히 살폈다.

 

베르나베우 회장의 시야는 그보다 더 넓었다. ‘돈 산티아고’는 비범한 투쟁심과 매우 활동적인 움직임을 보인 다른 선수를 주목했다. ‘몸에 깨지지 않는 주행 미터기가 심어진 것 같은 선수’를 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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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틸리케는 1970~1980년대 유럽 최고의 리베로 중 한 명이었다


“아구스틴, 우리는 저 5번 선수를 영입할 거야.”

 

베르나베우 회장이 일하는 방식은 이와 같았다. 선수 영입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이사회를 따로 소집할 필요는 없었다. 수십여년간 선수와 감독, 이사 그리고 회장으로 일하며 쌓인 경험과 관록은 누구도 따르지 못했다. 베르나베우 회장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고, 그의 직감은 거의 실패한 적이 없다.

 

베르나베우 회장은 슈틸리케가 레알의 새로운 피리(Pirri)가 될 수 있는 선수라고 판단했다. 본명은호세 마르티네스 산체스, 피리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선수는 베르나베우 회장 재임 시기에 레알 공격진과 수비진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보였던 선수다. 1964년부터 1979년 사이 레알에서 활약하며 10번의 라리가 우승을 이룬 선수다. 1976년부터 1980년까지는 레알의 주장이었다. 바로 이 피리의 황혼기를 대체할 선수로 슈틸리케가 낙점되었다. 한 스페인 라디오방송 나레이터가 ‘탱크’라는 별명을 붙여준 슈틸리케의 레알 이적은 그렇게 진행되었다.

 

■ 헌신, 열정, 성과…레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국인 선수 중 하나


슈틸리케는 레알에서 8시즌 동안 뛰면서 세 번의 라리가 우승과 한 번의 UEFA컵 우승, 두 번의 코파델레이 우승을 이뤘다. 현재까지도 슈틸리케는 레알 역사상 여섯 번째로 많은 공식 경기 출전 기록을 가진 외국인 선수다. 308경기를 뛰었다. 이 기록을 넘은 선수는 호베르투 카를루스, 디스테파노, 산타마리아, 마르셀루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뿐이다.


슈틸리케와 함께 뛰었던 동료들 모두 지금까지도 슈틸리케에 대한 엄청난 존경심을 표한다. 레알의 선수로 뛰었고, 이후 감독과 기술이사로 인한 아르헨티나 출신 호르헤 발바노는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레알에서 슈틸리케와 함께 한 시간은 겨우 한 시즌뿐이다. 그러나 발다노는 슈틸리케라는 선수의 매력을 느끼기에는 한 시즌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그는 완벽에 가까운 프로 정신을 갖췄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에는 아주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발다노는 슈틸리케와 함께 프리시즌 훈련을 치르던 당시의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레알은 스키 리조트와 인접한 오렌사나 지역의 카베사 데 만사네다에서 훈련 중이었다. 레알의 신임 사령탑으로 구 유고연방 출신의 부자딘 보스코프 감독이 부임했다. 그와 함께 피지컬 코치 보르지치가 당도했다. 보르지치는 전술 훈련보다 피지컬 훈련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프리시즌 기간 체력 훈련을 강도 높게 실시했다. 그는 3일에 한번씩 상세한 훈련 계획을 선수들에게 미리 설명하며 프리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발다노는 하루 일정을 마치기 전 커피 한잔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방에 올라가기 전 보르지치 코치로부터 다음 날 진행할 훈련에 대한 공지를 받았다. 보르지치는 산 위에 올라가서 1,200미터 달리기를 할 것이라고 했다. “600미터 지점에 도달하면 신호 표시를 해두었으니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거야.” 30여분 뒤에 슈틸리케가 화가 난 채 리셉션에 도착했다. 발다노는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씩씩거리고 있는 슈틸리케를 만났다. 슈틸리케는 “훈련 강도가 너무 세. 무리한 훈련이야”라고 말했다. 발다노는 “그걸 어떻게 알아?”라고 반문했다.

 

꼼꼼한 슈틸리케는 달리기 훈련에 대한 공지를 받고 사전 답사를 위해 그날 밤 바로 산에 올라가 본 것이다. 코스와 땅을 질을 살피기 위해 다녀왔다고 했다. 발다노는 슈틸리케의 이 같은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다음 날 아침, 레알은 달리기 훈련을 추가로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 보다 일찍 일정을 시작했다. 슈틸리케는 선수단 가운데 가장 먼저 코스를 주파했다. 보르지치 코치는 슈틸리케의 믿기지 않는 기록에 놀랐다. “신호 표시가 있는 곳까지 뛰어 갔다 와야해!” 그는 의심에 찬 소리로 슈틸리케를 나무랐다. 슈틸리케가 표식까지 가지 않고 돌아왔다고 여긴 것이다.

 

슈틸리케는 다시 이어진 달리기에서 보르지치가 신호로 표시해둔 통나무를 팔 사이에 끼고 돌아왔다. 성난 모습으로 보르지치 코치의 다리에 통나무를 던졌다. 마지막인 세 번째 달리기 순서에는 그 통나무를 들고 정확히 원래 둘었던 자리에 내려 두고 돌아왔다. 다음 번 달리기에서 슈틸리케는 코치가 신호로 표시한 통나무를 들고 돌아왔다. 슈틸리케의 철저함과 체력, 정확성과 기억력, 그리고 강인한 의지를 보여준 에피소드다. 과도한 훈련이라고 여겼지만 속임수를 쓰지도 편법을 쓰지도 않았다. 슈틸리케는 최선을 다해 훈련을 완수했고, 자신의 방식으로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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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은 슈틸리케를 클럽 전설 중 한 명으로 예우하고 있다.

 

레알의 역사적인 선수 중 한 명인 리카르도 가예고는 합숙 훈련을 할 때 슈틸리케와 자주 룸메이트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증언을 들어보자.

 

“울리는 굉장히 엄격한 프로페셔널이었다. 그는 뼛속까지 독일 사람이었다. 정돈된 친구였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살면서 울리 같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워낙 올곧은 성격의 선수였기에 라커룸 내의 몇몇 개성 있는 선수들과는 충돌하는 경우가 있었다. 불운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스타 후아니토도 그 중 한 명이다. 발다노는 “후아니토는 완전한 안달루시아 사람이었고, 울리는 완전한 독일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나칠 정도로 달랐다”고 기억했다. 슈틸리케는 1985년에 레알을 떠나 스위스 클럽 뇌샤텔로 이적했는데, 운명을 얄궂었다. 뇌샤텔은 곧바로 유럽 대항전 무대에서 레알을 만났다. 후아니토는 동료로 뛰던 시절의 불만을 경기 도중에 표출했다. 슈틸리케에게 침을 뱉었다.

 

또 다른 레알 레전드 이시도로 산 호세는 슈틸리케과 좋은 친구 사이였던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는 1970년대 레알이 영입한 ‘독일 커넥션’ 가운데 슈틸리케가 스페인 마드리드 생활에 가장 잘 적응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레알은 그 당시 세 명의 독일 선수를 영입했다. 네처와 브라이트너, 슈틸리케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울리는 가장 라틴 사람 같은 성질을 같고 있었다. 뜨거운 피를 가졌고, 머리는 냉철했다. 굉장한 경기력을 펼쳐 보였고, 아주 경쟁적이었다.”

 

실제로 슈틸리케는 스페인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수들 중 으뜸이었다. 스페인 축구전문지 ‘돈발론’이 선정한 올해의 라리가 외국인 선수상을 1978년부터 1982년까지 4년 연속 수상했다. 앞서 1977년과 1978년에 이 상을 받은 인물은 네덜란드 출신의 요한 크라위프였다. 슈틸리케의 당시 평판은 이 정도였다.

 

올해의 라리가 외국인 선수상을 4년 연속 수상한 인물은 슈틸리케가 유일하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포르투갈 윙어 루이스 피구가 3년 연속 수상했고, 리오넬 메시는 2007년과 2009년, 2010년에 수상했다. 2008년에 세르히고 아구에로 받아 연속 기록이 끊겼다.


이시드로는 오늘 날까지도 슈틸리케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만날 때면 종종 함께 골프 경기를 같이 즐기는 사이다. “울리는 이제 독일 사람이라기 보다는 스페인 사람에 가깝다. 해가 갈수록 그는 쉬는 기간에 독일이 아닌 스페인을 찾는다. 그가 스페인에 사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 그 증거다.”

 

라울 곤살레스 이전에 레알에서 ‘불멸의 주장’으로 불린 마놀로 산치스는 슈틸레케가 막 레알에 입단했을 때 라커룸의 신출내기였다. 마놀로는 슈틸리케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아주 진중한 사람이었다. 존경심을 갖기 위해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게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와 깊이 친밀해지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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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는 1980년대 축구 전술 발전에 영감을 준 선수였다.


■ 그라운드 전역을 지배한 리베로의 표본


1970년대말부터 1980년대 초 사이 레알의 최고 스타는 401경기에서 121골을 몰아친 후아니토였지만, 레알 공격진이 화려한 축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 뒤를 든든히 받친 슈틸리케의 헌신이 있었다. 슈틸리케는 탱크라는 별명 외에도 스페인에서 ‘또도떼레노(todoterreno)’라 불렸다. ‘todo’는 ‘전체’, ‘terreno’는 그라운드를 뜻한다. 그라운드 전역을 지배하는 선수라는 뜻이 담겨있다. 레알마드리드 공식 홈페이지는 슈틸리케를 레알 레전드 중 하나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에게 붙인 별명은 ‘전차(el Panzer)’다.


그렇다고 슈틸리케가 무식하게 많이 뛰기만 하는 선수였던 것은 아니다. 레알 데뷔 시즌에는 13골을 기록해 팀내 두 번째로 많은 골을 넣을 정도로 빼어난 득점력을 과시했다. 그는 레알 경력 기간 총 50골을 넣은 골잡이이기도 했다.

 

슈틸리케는 선수 생활을 미드필더로 시작했지만, 리베로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수비수 포지션에서 경력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슈틸리케의 전술적 역할이 상대 공격을 차단하는 최후 방어자였던 것은 아니다. 근거 지역이 수비 라인이었을 뿐이다. 상대 공격을 막아내는 일은 물론 공격이 진행될 때는 최전방 공격수의 뒷자리까지 치고 올라가는 역동성을 보였다.


슈틸리케가 달리기 시작하면 베르나베우 경기장은 “울리! 울리!”라는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슈틸리케는 관중석을 열정의 향연으로 가득 채우는 선수였다. 그 열정은 동료 선수들에게도 전달했다. 그는 팀 전체를 열정적으로 뛰도록 만들 수 있는 선수였다.

 

1986 멕시코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던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은 리베로의 전술적 움직임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빌라르도 감독은 슈틸리케의 플레이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자문을 얻고 싶었다. 빌라르도 감독은 거침 없고,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직접 마드리드로 날아가 슈틸리케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마치 기자라도 된 듯 슈틸리케를 만나 대뜸 물었다.

 

"리베로는 어떻게 뛰어야 합니까? 성공하기 위한 열쇠는 무엇인가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그냥 나처럼 뛰면 된다는 거에요."


슈틸리케는 그렇게 답한 것으로 알려진다. 빌라르도 감독은 디에고 마라도나의 마법 같은 플레이의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탁월한 지도력을 보이며 아르헨티나를 멕시코 월드컵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황혼기의 슈틸리케는 1984년에 서독 대표팀에서 물러나 이 대회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슈틸리케에게 영감을 받은 아르헨티나가 슈틸리케를 잃은 독일을 제치고 우승컵의 주인이 됐다.

 

슈틸리케는 현역 시절 우승 청부사였다. 그는 챔피언스리그와 UEFA컵(현 유로파리그), 지금은 사라진 UEFA컵위너스컵 결승전에 모두 출전한 몇 안되는 선수다. 다만 지도자로는 아직 인상적인 성과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지도자 경력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말한 한국 대표팀을 맡아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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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대한축구협회 제공


슈틸리케의 전설은 한국 축구 팬들에게 더더욱 기대를 모으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슈틸리케의 전설은 61년 전 오늘, 1954년 11월 15일에 시작했다. 한국 축구는 지금 전설과 함께 하고 있다. 


Feliz cumpleanos! 생일 축하합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울리 슈틸리케 감독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