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버드맨 (Birdman, 2014)

Doctrine_Dark 2016. 2. 15. 00:57





위험한 영화다. 이 영화는 오늘날 현대인이 느끼는 존재의 불안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씨니컬한 관점에서 농담하듯 그 본질을 툭 내뱉는다.

 이 농담은 누군가에겐 미처 깨닫지 못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겐 무의식이 애써 외면하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차마 꺼내지 못하던 이 이야기가 수면 위로 올라온 이상,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더러운 진실이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발전의 첫 번째 단계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니까.



['진정한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만들어진다.]


영화 초반부 리건의 거울 구석에 적혀있는 메모를 기억하는가? '타인의 시선을 떠나서 너는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답다'는 식의 내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건강하고 건전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정면으로 들이박고는 철저하게 비웃는다.


영화 시작에 나오는 두개의 질문과 그 답변을 한번 보자.


Q : 그래서 당신은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까?

A : 그렇다.

Q : 그게 무엇이었습니까?

A : 사랑 받을 기회를 얻은 것.

(사실 정확한 문장의 질문과 대답인지는 자신 없지만 맥락상의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사랑 받을 기회'란다. 하지만 이 영화 속 모든 캐릭터들은 '사랑 받고 싶은 욕구'를 뭔가를 '사랑하는 척'하면서 자꾸만 숨기려 든다.




 리건은 과거 자신의 대표작인 버드맨의 낙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망상 속에서는 초능력을 쓰고 버드맨과 대화를 하며 자신 안의 버드맨을 버리지 못한다. 이러한 버드맨은 자신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았던 때 즉 전성기를 의미한다. 하지만 리건은 이를 수치스러운 과거로 여기고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재기를 준비한다. 하지만 이 의미 있는 일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마이크의 거짓 인터뷰를 보며 '사랑 받을 기회'를 계속해서 훔치는 그에게 분노한다. 전 부인과의 대화에서는 조지 클루니와 함께 비행기를 탔던 이야기와 마이클잭슨과 같은 날 죽음을 맞이한 한 배우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벗어나는 문제는 존재의 생존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유무 차원으로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연극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표현한다. 이에 딸 샘은 의미 있는 일(예술을 대변한다고 생각된다.)이 사실 리건만 신경 쓰는 일이라며 분노한다. 그리고 이 연극에 관해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으며, 블로그 트위터는 물론 페이스북 계정 조차 없는 리건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SNS야 말로 전 세계 타인에게 나를 전시하는 곳이 아닌가. 그러한 창구가 없는 사람은 존재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리건은 영화 중후반부에서 벌거벗은 채로 극장을 한 바퀴 도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벌거벗은 리건은 리건 그 자체이다. 그는 버드맨의 수트를 입지도 않았고 연극 속 인물을 표현하기 위한 가발이나 옷을 입지도 않았다. 과거의 스타배우도 오늘날의 연극배우도 아닌 그저 리건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뉴욕의 시민들은 그를 뭐라 부르는가? 버드맨이라 부른다. 그를 리건이라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단지 버드맨의 팬과 버드맨을 싫어하는 안티팬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이크를 한번 살펴보자. 마이크는 대중과 비평가들을 '질질 싸게' 만드는 배우이다. 무대에서의 그는 모두의 사랑을 받지만 무대 뒷편의 그는 구제불능 아웃사이더이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무대에서 '진짜'가 된다. 진짜 술을 마시고, 다른 이들의 무대도 연기도 가짜라며 비웃으며 관객들에게 스마트폰(SNS)를 벗어나 진짜를 보라고 외친다. 심지어 현실에서는 잘 서지도 않는 똘똘이(소중이? 뭐라 부르건간에 그거...)가 무대 위에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에게는 무대 위의 자신이 '진정한 자신'인 것이다. 그곳이 자신이 인정받고 사랑 받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크 또한 리건과 마찬가지로 연기를 하는 것 그 자체(예술 행위)에 만족한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명성을 예술의 헤픈 사촌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술집에서 리건 팬들의 사진기사 노릇을 해줄 때의 그의 표정과 이후 보이는 행동들은 결국 그도 인정과 관심을 갈망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리건의 딸 샘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약 중독으로 인해 재활원까지 다녀온 샘은 그 원인을 아버지의 부재에서 찾는다. '타인의 시선' 결핍이 일어나게 되자 억지로라도 '타인의 시선'을 잡아끄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곤 아버지의 가장 큰 실수를 부재에 대한 사죄로 자신을 '특별'하다고 말해준 것이라고 마이크에게 말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마이크가 그 특별함에 대해 인정하자, 샘은 그에게 키스를 하고 둘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마이크라는 '타인의 시선과 인정'을 받는 순간 샘의 마음 속 어딘가가 뻥 뚫린 것이다.


 리건의 애인 로라(전 부인 말고...)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리건의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의 사랑을 받고 싶어 안달이다. 리건이 레슬리에게 '당신은 아름답고 재능있어. 당신과 함께 일해서 행운이야.'라는 대사를 날릴 때, 자신은 2년간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는 사랑에 질투하고 그런 대사를 자신에게 해주는 레슬리에게 순간적으로 동성애적 사랑까지 느낀다. (동성애적 사랑이었다기 보다는 그 순간 레슬리는 로라에게 타인의 인정이고 사랑이었다.)


 연극 비평가 실비아는 마이크의 대사를 짐작해볼 때, 예술가가 되려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비평가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닫지 못한 신성한 곳에, 리건과 같은 '연예인'이 나타나서는 '타인의 시선'을 강탈하는 것을 못 견딘다. 그래서 보지도 않은 연극을 부수어버리겠다고 리건에게 호언장담한다. 비평가라는 타인의 시선을 컨트롤하는 입장에서 눈에 띄는 이물질로부터 '예술을 향한 타인의 고귀한 시선'을 지키겠다는 가식적 명분으로 '예술을 향한 타인의 시선'을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리건이 오프닝 공연에서 실제 총으로 자신의 코를 날려버리자 그 마음을 바꾼다. 이러한 연극에서 악평을 쓰는 것은 자살행위라 생각했으리라. 그래서 실비아는 어마어마한 호평 세례를 퍼붓는다. 그래야 남들로부터 자신은 여전히 실력 있는 비평가이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배신감을 주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온갖 미사어구와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 ‘초극사실주의등의 그럴듯하고 어려운 낙인을 찍어가며 리뷰를 작성한다.


 이번에는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라는 연극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실제 원작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리건은 오프닝을 앞두고 이 연극이 자신의 삶의 축소판 같다는 말을 한다. 이 연극 안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사랑 받지 않음을 확인한 주인공은 '자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여기에도 없다'며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자살한다. 사랑 받지 않는 존재는 존재의 의미 자체가 없어짐 이 연극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타인의 시선과 그들의 인정에 따른 자신의 존재 확인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발버둥 치는 주인공들을 결코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의 불안하고 어긋난 행동을 시시껄렁한 농담하듯이 툭툭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후반부 리건의 무의식 속 버드맨이 직접 등장해 리건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이 농담의 종지부를 찍는다. 리건의 갈등이 해소되는 장면이기도 한 이 부분에서 버드맨은 리건에게 말한다. “다시 버드맨이 되어서 부활해라. 사람들은 폭력과 피를 좋아한다. 관객들은 줄을 서서 영화 표를 살 것이고, 여드름투성이의 십대들은 질질 쌀 것이다. 너는 그들 위에서 신이 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말한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고 진정한 자신을 찾고 존재 자체로 아름다워라가 아닌 인정해. 결국 너도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잖아. 네가 말하는 예술(타인의 시선과 무관한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도 결국은 더 높은 차원의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 아니야? 가식 떨거 뭐 있어? 인정하면 편해.”

이 메시지를 인정한 리건은 추락하는가? 아니 되려 날아오른다. 오프닝 당일 연극에서는 처음으로 차분하고 초연한 모습까지 선보인다. 그가 후반부에 보여주는 이러한 자아성찰의 본질은 저급하다. 하지만 이러한 저급한 자아성찰은 결국 그에게 또 다른 전성기를 선사한다.


이 영화의 긴 롱테이크는 리건이 오프닝 무대에서 자신의 코를 실제 총으로 날리면서 처음으로 끊어진다. 타인에게 버드맨으로서 살아온 리건의 인생이라는 연극의 1막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연극으로 자신의 또다른 전성기를 찾은 리건은 버드맨의 가면(병원에선 얼굴에 쓴 붕대로 표현된다.)을 벋고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버드맨에게 작별을 고한다.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새로운 순간이 찾아오자 이전의 자신은 없어지고 새로운 자신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저급한 갈등해소인가? 이 영화의 농담이 위험한 이유이다. 하지만 분명 오늘날 예술가와 예술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농담이다.

메이저 문화산업을 돈의 노예라 욕하고 스스로를 예술 문화의 수호자인양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질은 결국 열등감이다. 결국 그들이 말하는 예술이란 자신이 생각했을 때 조금 더 고차원적인 타인의 인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막상 메이저 산업이든 예술 산업이든 이것을 소비하는 대중들은 그저 이거보고 무슨 커피를 마실까?’(샘의 대사처럼)라고 생각할 뿐, 발버둥치는 것은 예술과 문화산업 뒤편에 있는 사람들뿐이다.


나쁜 영화다. 블랙코미디의 농담은 그 안에 무서운 진실을 내포한다. 이 영화는 이상한 농담으로 사람을 벙찌게 만들어 놓고는 혼자 키득이며 우리를 비웃는 듯한 엇박의 드럼스코어와 함께 조용히 뒤돌아 사라진다.


결국 인생이란 연극무대에선 애초에 진짜 는 없다. 그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연기하는 수많은 내가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타인에 의해 가장 많은 인정을 받고 사랑받는, 즉 전성기의 내가 진짜 나를 대체할 뿐이다. 안타깝게도 이 안에서 컷은 없다. NG가 날지라도 계속 가야한다. 리건이 벌거벗고 극장에 들어와 연기를 이어 가듯이...

그리고 이 연극 안에서 우리가 말하는 예술은 결국 타인의 시선을 속일 허구이며 포장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버드맨의 역을 맡는 순간, 새로운 막이 시작되며 우리는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아주 저급하고 저렴한 자아실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