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이런 스트라이커는 한국에 없었다

Doctrine_Dark 2016. 2. 15. 23:03

올림픽대표팀 공격수 황희찬

지난 1월26일 오후(현지시각) 카타르 도하 알사드 스포츠클럽에서 열린 2016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4강 카타르 대 대한민국 경기. 이날 황희찬(왼쪽)은 골잡이보다 더 중요한 승리의 파수꾼으로서 면모를 보여주었다. 연합뉴스
기술인가? 멘털인가?

20살의 올림픽축구대표팀 공격수로 한순간 스타로 떠오른 황희찬의 두 영역은 연구 대상이다. 과거에 비해 훨씬 빨라진 축구에 적응한 미래형 공격수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술적 다재다능함이다. 한 몸에 여러 가지 다른 능력을 요구하는 ‘멀티’ 수요에 충실한 그의 모습은 리우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겸해 1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던 2016 아시아축구연맹(AFC) 23살 이하 챔피언십 경기에서 드러났다. 형들보다 3살이나 어린 20살의 막내는 우즈베키스탄과의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2개의 도움을 배달하면서 축구팬들의 눈길을 일거에 집중시키더니, 카타르와의 4강전에서는 70m 드리블 돌파로 팬들의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었다. 골잡이는 골을 넣어야 하지만, 승패를 결정하는 황희찬은 골잡이보다 더 중요한 승리의 파수꾼이었다. 보기에도 실팍한 가슴과 당당한 어깨, 저돌적인 돌파와 드리블 능력, 뻣뻣함을 털어버린 유연한 몸동작과 경기를 읽는 여유까지.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특기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과거의 공격수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팬들은 반항기 넘치는 그가 선보인 새로운 축구에 탄성을 질렀다. “저 선수 누구야?”

축구를 쉽게 하면서도 무섭게 하네

선수 감식안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이 처음 그를 봤을 때의 느낌도 다르지 않았다. 의정부 신곡초등학교 6학년 때 그를 처음 본 최문식 대전 시티즌 감독. 당시 포항제철중을 이끌었던 그는 원래 다른 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신곡초의 경기를 보러 갔다고 한다. 그러나 황희찬을 보고는 그의 매력에 푹 빠졌다. “우연찮게 신곡초의 스트라이커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뛰는 모습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갖고 있지 않은 자질을 발견했다. 단순히 기술이나 동작의 우월함이 아니었다. 축구를 쉽게 하면서도 무섭게 한다고 할까.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유형의 스트라이커는 지금 우리나라에 없다. 세 살 적 버릇 여든 간다고 하지 않는가.” 포항제철고 시절 은사인 이창원 대전 시티즌 코치도 비슷한 당혹감을 경험했다. “그가 운동장에 들어서면 모든 것이 그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된다. 상대방도 그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스피드와 피지컬을 본 순간 상대 선수들은 그에게서 위압감을 느끼는 것 같다. 팀의 동료들도 황희찬의 영향 아래 놓인다. 행여 패스 타이밍을 놓쳐 그에게 공을 넣어주지 못하면 동료들이 먼저 미안해했다.”

태양계의 중심처럼 끊임없이 에너지를 방출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또 그 폭발력은 타고난 것인가. 이런 궁금증은 그의 이력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받은 차범근 축구대상이 그렇다. 우수상, 장려상이 아닌 대상은 초등학교 최고의 선수 딱 한명에게 주어진다. 축구를 시작한 지 3~4년 된 선수가, 그것도 부천 까치울초등학교 축구부가 해체돼 의정부 신곡초로 옮겨가는 우여곡절을 겪고서 축구대상을 거머쥔 것은 ‘운동선수는 노력보다는 타고난 재능’이라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물론 재능은 그 자체로 완성품이 되지 않는다. 우연과 행운 등 초자연적인 힘을 비롯해 의지와 열정, 한 나라의 유소년 축구 육성 시스템, 축구 수준, 세계 흐름에 대한 감응도, 심지어 대표팀 감독이 누구냐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요소들이 화학반응을 해야 개화한다.


황희찬은 2002 한일월드컵 키드다. 한국이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에 올랐고, 온 나라가 응원 열기로 휩싸였던 2002년 6월은 한국 축구사의 일과성 사건이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통해 4강 신화를 접한 아이들은 축구공을 사달라고 졸랐고,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것은 일종의 월드컵 유산이었고, 황희찬도 그런 아이 가운데 하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추운 날씨에 공을 갖고 밖으로 나간 손자를 걱정했다. 황희찬의 가계에 운동선수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공을 곁에서 떼놓지 않고 함께 굴렀다. 경기도 부천에 4대 대가족이 살던 집이 단독주택이었기에 망정이지, 아파트였다면 층간소음 문제로 부모의 속이 시커멓게 탔을 것이다.

보약 한첩 지어 먹지 않고, 우유를 보양식으로 들이켠 황희찬은 마법의 콩나무처럼 성장했다. 초등 시절부터 해결사를 맡더니 포철중에서는 대한축구협회가 선정하는 최우수선수로 뽑히게 된다. 고교 때는 16살 대표팀을 거쳐, 2학년 때는 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왕중왕전 최우수선수와 득점왕을 차지한다. 대개 감독은 3학년 선수에게 최우수선수상을 주고 싶어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냉정하게 황희찬을 낙점했다. 한살 적은 나이에 19살 대표팀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고교 시절은 차원을 달리하는 절대 랭킹 1위였다. 김태륭 축구해설위원은 “하루아침에 반짝 등장한 스타가 아니다”라고 했는데, 실제 황희찬이 고교 3학년 때 당시 한국에 온 거스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네덜란드 명문 에인트호번 입단을 제안받기도 한다.

해외에서부터 가치를 인정받은 그의 상품성은 2002 월드컵을 기점으로 바뀐 축구 환경에서 비롯됐다는 분석도 있다.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한일월드컵을 거치면서 국제 수준의 스타디움 등 하드웨어 환경이 바뀌었을 뿐 아니라 프로축구 클럽의 유소년 축구 시스템이 안정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황희찬이 한국 유소년 클럽을 선도적으로 육성한 포항의 유스팀에서 훈련을 받은 것은 선수로서 대성할 수 있는 도약대를 만난 것과 같다”고 했다. 2002년 이후 포항을 비롯해 FC서울, 수원 삼성 등 대부분의 프로구단은 체계적인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올림픽팀의 권창훈이나 문창진, 김현 등도 모두 프로 유스팀 출신이다.

좋은 지도자를 만나는 운도 남달랐다. 황희찬을 발탁한 최문식 감독이나 포철고 시절 가르쳤던 이창원 코치는 프로 출신으로 바르셀로나 티키타카 축구를 선호한다. 뻥축구가 아니다. 포철중 은사인 김동영 FC서울 코치는 전남 장흥초를 시작으로 포철동초, 포철중, 포철공고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며 20년 넘게 유소년만 전문으로 키웠다. 포항 구단이 아기자기한 패스를 통한 공격적인 축구로 육성 방향을 정하면서 선수들의 능력치를 극대화시킨 것도 분명해 보인다. 이창원 코치는 “고교 시절 포철고를 만난 상대팀들은 수비를 자기 진영 깊숙이 내려서 세웠다. 그러다 보니 포철고 공격수들은 상대 진영의 매우 좁은 공간에서 공격로를 만들어내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황희찬이 기술적으로 좀 더 세련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70m 드리블 돌파로 팬들의 가슴
뻥 뚫어준 카타르와의 4강전
받아먹기보다는 창조하고
고정된 영역에서 움직이기보다
다양한 침투로 개척하는 공격수

오스트리아 2부 리퍼링서 출발
1부 잘츠부르크 올라 생존경쟁
수아레스를 모델로 삼은 그가
잘 살아남아 본궤도에 오르면
슈틸리케 공격카드 추가될 것


멘털의 비밀 “만족하지 않는다”

물론 기술이 성공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차범근 대상을 받고도 이름없이 사라져간 선수들은 많다. 여기에 “단 한순간도 나에게 만족한 적이 없다”는 황희찬 멘털의 비밀이 있다. 최문식 감독은 “황희찬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높은 기준을 적용한다. 너무 엄격해 만족을 모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늘 상승한다”고 했다. 이창원 코치도 비슷한 사례를 들었다. “포철고 시절 깜깜한 새벽에 숙소에 올라갔을 때 황희찬이 운동장에서 들어오는 것을 봤다. 남들 잘 때 자기 자신만의 운동 프로그램을 소화하고 왔다고 하더라. 보통 정상급 선수는 자만할 수도 있는데 황희찬은 절대 그런 것을 모른다”고 했다. 겨울 휴가 뒤 비행기 타고 가장 먼저 숙소로 들어와 개인 체력훈련을 하는 모습을 본 다른 학부모들이 뒤늦게 들어가는 자기 아들을 혼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청소년 대표팀 소집으로 파주에 모일 때도 그는 일착이다.

자신에게 가혹한 황희찬의 또 다른 강점은 엄청난 학습 욕구다. 그것은 부모나 코치의 강요에 의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창원 코치는 “보통 사람들은 한번 했다가 안 되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황희찬은 실패해도 절대 굴복하지 않고 다시 부닥치는 멘털을 갖추고 있다”고 표현했다. 배울 수만 있다면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 축구공을 지남철에 쇠붙이 붙이듯 몸에 달고 다니는 프리스타일 축구의 세계적 고수 전권씨는 축구팬들에게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고교 2학년 때부터 시작해 프로 선수가 돼서도 휴가 때마다 찾아오는 황희찬이 앞으로 더 큰 잠재력을 선보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말 황희찬을 만난 전권 제이케이(JK)전권 아카데미 트레이너는 “프리스타일 축구는 몸을 유연하게 사용해 경기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다양한 상황에 감각적이고 빠르게 대처하도록 해준다. 황희찬은 그런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온다. 아마 드리블 기술에도 조금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도 배우면 실력은 늘게 마련이다. 전권 트레이너는 “중학교 3년까지가 운동 능력을 학습하는 황금의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20살이 넘어도 연습하면 기량이 좋아진다. 황희찬의 목표는 국내 최고 선수가 아닌 것 같다. 루이스 수아레스나 네이마르도 아니다. 그들을 뛰어넘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했다.

황희찬이 우쭐한 기분을 내다가 크게 혼쭐난 적도 있다. 황희찬의 에이전트인 김홍근 에이치케이(HK)스포츠매니지먼트 대표는 “황희찬이 포철중 2학년 때일 것이다. 당시 허리에 약간의 부상이 있었는데, 자기가 빠지면 팀이 어려울 것이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 김동영 감독이 아주 박살을 냈다. ‘너 같은 놈 필요 없다’며 엘리트 의식을 쏙 뺐다. 부모님도 감독의 뜻을 따라주었는데, 황희찬이 이때 크게 깨달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학생 시절 대표팀 유니폼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리 없지만, 그는 친구들을 만날 때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그동안 받은 수없이 많은 상에 대해서도 거리를 둔다. “상을 받을 때마다 내가 잘했다거나 자만심을 느낀 적이 없다. 상을 받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항상 부족함이 떠올랐다. 단 한번도 속 시원히 잘했다는 만족감으로 상을 받은 적이 없다.”

진화하고 싶어 안달난 괴물

황희찬은 정말 큰 선수로 도약하느냐 여부를 가릴 기로에 있다. 오스트리아 프로리그 1부 선두인 잘츠부르크에서의 생존경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애초 2부 리퍼링에서 출발한 황희찬은 발군의 활약으로 지난해 말 1부에 올라서 2경기에 출전했다. 괜스레 빅리그의 팀에 들어가 띄엄띄엄 뛰는 것보다는 낮은 단계의 리그라도 풀타임 출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러나 7일 시작된 후반기 첫 경기에는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했다. 2부 리퍼링 시절 초기 “너네 내가 여기에 적응하고 몸이 올라오면 두고 보자”라며 독기를 품었던 황희찬은 빨리 회복해 경기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검게 그을린 뺨과 넓은 미간, 그 양쪽으로 삐친 눈과 각진 얼굴에서 느껴지는 거친 이미지는 불같은 의지를 대변한다. 그런 마음의 다짐 때문인지 3주 진단을 받은 왼쪽 허벅지 햄스트링 부상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수아레스를 롤모델로 삼은 황희찬이 본궤도에 오른다면 점유율과 패스를 통한 빌드업 축구를 지향하는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대표팀에도 공격 카드가 추가될 것이다. 황희찬의 등장으로 받아먹기보다는 창조하고, 고정된 영역에서 움직이기보다는 다양하게 침투로를 개척하는, 머뭇거리지 않고 지체 없이 기회를 열어주는 역량이 차세대 한국형 공격수의 조건이 됐다. 신태용 올림픽팀 감독도 “상대 수비수를 정말 잘 괴롭힌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더 발전할 수 있다”며 잔뜩 기대를 걸고 있다. 지금까지 해왔듯이, 혼자서 살아남아 주변의 동료와 적까지 제압하는 길만 남았다.

다행히 황희찬은 한번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잡는 재주가 있다. 특별히 개인 훈련을 많이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체력 보강을 위한 웨이트는 남보다 더 많이 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만큼 근육질 몸을 만드는 데는 각별히 신경을 쓴다. 좁디좁은 차고에서 드리블 연습을 하는 것도 특유의 서바이벌 정신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달 반 정도 일정으로 잘츠부르크에 온 어머니가 해주는 소고기 요리와 된장찌개, 떡볶이에 몸과 마음이 흐뭇하다. 정갈하고 깔끔한 음식을 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오스트리아 관광 시켜드리기 위해 열심히 뛰겠다”는 각오도 다진다. 그래도 이 축구광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질문. “정말 큰 선수가 되기 위해서 앞으로 보완해야 할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기자) “정말 모든 게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피지컬이든 기술이든 상황인식이든. 모든 부분에서 훨씬 더 업그레이드되고 더 빨라져야 합니다.”(황희찬) 정말 진화하고 또 진화하고 싶어 안달난 괴물이 따로 없다.

김창금 기자
김창금 기자 kimck@hani.co.kr

▶ 김창금 여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란 말이 있다. 그런데 축구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학창시절도 아닌 군대였으니, 여자들은 이런 마음을 알까? <한겨레> 스포츠 기자로 1999년 이후 줄곧 축구기사를 써오면서 대한민국 여성들이 마음껏 축구 할 수 있는 날을 만드는 꿈을 간직해왔다. 스포츠 경제와 스포츠 인권에도 관심이 많다. ‘김양희의 야구광’과 함께 한달에 한번씩 번갈아 연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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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공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