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특종: 량첸살인기 (The Exclusive : Beat the Devil's Tattoo, 2015)

Doctrine_Dark 2016. 2. 15. 01:20





최근 JTBC에서 방영 중인 <송곳>이라는 드라마엔 흥미로운 장면이 있습니다. 이수인(지현우)이 장래 희망에 꼰대라고 쓰는 장면. <송곳>이 웹툰 때부터 인기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수인이 꼰대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회생활에 익숙해질수록 알아가는 것들이 있죠. 그 꼰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그에 대한 저항은 마블 코믹스의 초인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대중이 <송곳>이라는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특종: 량첸살인기>(이하 특종)<송곳>과 달리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주인공이 꼰대 되기를 수용하는 영화입니다.


  

<세븐> vs <특종> ‘책과 살인

책 속의 내용이 단서가 되는 살인사건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습니다. 충격적인 결말과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 <특종>을 보고 이 영화가 떠올랐다면 과했을까요. <세븐> 속의 범인이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살인하듯, <특종>의 살인마는 <량첸살인기>라는 책에서 영감을 얻어 살인을 계획합니다. 미스테리의 중심에 책이 있고, 범인을 추리하는 과정에 이 책이 큰 단서가 된다는 점에서 두 영화의 전개는 살짝 닮았습니다.

 

책을 소재로 일어난 연쇄살인이었다는 점에서 같지만, 범죄의 목적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이 영화가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죠. 허무혁(조정석)의 인생과 량첸살인기사건이 평행선을 달리며 관객에게 메시지를 던진다는 것이 <특종>의 매력입니다. <세븐>의 살인마(케빈 스페이시)는 자신이 타락한 세상을 벌하겠다는 생각으로, 신곡에 언급된 죄악을 범한 인간을 죽이죠. 하지만 <특종>의 살인마는 애초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언론을 통해 량첸살인기라는 책의 존재를 알게 되죠. 이후 살인마는 대중이 그 책 속의 살인이 재현되었다고 믿게 하기위해 계획을 세웁니다. (‘믿게 하다라는 것의 흥미로운 점은 뒤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두 영화 모두 결국엔 진짜 범인이 죽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르죠. <세븐>에서 살인마의 죽음은 거대한 계획 중 하나였고, 그 죽음으로 연쇄살인의 퍼즐은 의도대로 완성됩니다. 하지만 <특종>에서 살인마의 죽음은 계획되지 않은 일이었고, 연쇄살인의 퍼즐은 기이하게 완성됩니다. 진범은 세상에 밝혀지지 않고, 그 누고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살인사건이 해결 된 거죠. 그리고 이 사건을 새롭게 구성하는데 언론이 큰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 <특종>의 연쇄살인은 언론의 프레임이 봉합하고 완성한 사건입니다. 이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도 연관이 있죠. <세븐>이 타락하고, 서로에게 무정한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였다면, <특종>은 타락한 언론에 대한 조소였습니다.


  

잘려나간 프레임, 잘려나간 언론

<특종>의 화면은 답답한 편입니다. 풀 샷에서조차 헤드룸(인물 머리 위의 공간)이 좁아 인물들만으로 화면이 꽉 차는 느낌을 주죠. 이는 인물을 화면에 억지로 구겨 넣었다는 느낌과 함께, 프레임이 무엇인가를 배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인물 주위의 도구와 배경 등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 같죠. 동시에 영화가 언론의 프레임 이론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추구한 좁은 프레임은 분명 특별한 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프레임 이론이란 대중이 언론이 정해준 틀 안에서 보고, 사고한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영화의 좁은 프레임, 미장센과 연관시키면 어떨까요. <특종>의 이야기는 허무혁이 조작한 이야기가 중심에 있습니다. 허무혁은 그의 이야기를 성립시키기 위해 많은 정보를 배제하고, 사건은 한 부분을 확대하여 진실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혹은 대중이 믿을 법한 흥미로운 이야기로 제조해내죠. 이처럼 그가 작은 정보를 프레임에 꽉 차게 담아, 엄청난 진실로 둔갑시키는 과정과 이 영화의 답답한 프레임이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영화가 추구한 프레임을 통해 관객은 좁은 시야를 간접 경험할 수 있죠. 허무혁이 대중의 시야를 좁혔듯, <특종>을 관람하는 관객도 좁은 영상 프레임 때문에 배경을 제대로 인식하기 힘들고, 시야가 좁아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영화 속 언론과 프레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특종>에서의 언론은 윤리적이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정의롭다는 말과도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영화의 도입부, 허무혁은 광고주와 얽혀있는 민감한 뉴스를 보도합니다. 언론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정직 처분이었죠.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그림 중에 광고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일은 카메라에 담을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 카메라의 프레임에 광고주와 관련된 그림이 들어올 자리는 없고, 이 말은 카메라가 비출 수 있는 세상도 그만큼 좁아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광고주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 외에도 <특종> 속의 언론이 중요시하는 것이 있습니다. 시청률이라는 것이죠. <특종>은 시청률이 보도형태를 결정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언론사가 특종이 필요한 이유도 타 매체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수 있다는 힘 때문이죠. 허무혁은 의문의 살인마를 먼저 보도해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일념으로 현장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큰 실수,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성급하게 보도해 일을 꼬이게 하죠.


  

이 첫 오보를 숨길수록, 가짜 살인마에 대한 이야기는 살이 붙고, 대중이 믿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리고 영화 속 사건을 다루는 언론의 목표는 진실의 추구가 아닌, 대중이 믿게 하는 이야기를 담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특종>의 살인마와 언론은 교집합을 이룹니다. 살인마가 대중이 믿게 하기 위해 살인을 조작했다면, 언론은 그들이 보도한 이야기를 진실로 만들기 위해, 프레임을 좁혀 필요한 정보만을 부각해 보도하는 모습을 보였던 거죠.

 

<특종>에서 언론 종사자들의 대사 중엔 국민의 알 권리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국민의 권리를 위해 보도해야 한다, 나중에 보도 때문에 경찰과의 마찰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언론인이라면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의 뉘앙스를 가진 대사들이 종종 있죠.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알 권리라는 것은 방송사의 이익 여부에 따라 가변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광고주와 얽힌 사안에서 알 권리는 무시되었죠. 그런데 연쇄살인을 다룰 때는 방송사가 법적인 문제, 경찰과의 마찰 등의 위험에 빠질 수 있음에도 알 권리때문에 보도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 영화 속 언론인들은 자신들의 밥그릇 문제 때문에 알 권리는 무시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법적, 윤리적 문제를 회피하고서 특종을 보도하고 싶을 때는 알 권리 뒤로 숨어버리죠.


  

그렇게 꼰대가 된다

무혁의 오보는 살이 붙고 리얼리티를 얻습니다. 그가 거짓을 추가할 때마다 이야기(거짓말)는 살이 붙지만, 언론의 프레임은 점점 더 좁아지고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죠. 많은 정황 중 무혁의 이야기에 적합한 것만 선택되어 조명받고, 대중은 그 조명이 비추는 프레임이 사건 전부라 믿습니다. 이 리얼리티를 갖춘 살인 이야기에 살인자는 응답하죠. 언론이 만든 허구를 진실로 만들기 위해 살인자가 동참하는 이상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무혁의 노력 덕분에 그 살인은 막을 수 있었지만, 재미있는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죽은 살인자는 용감한 시민이 되었고, 살인을 막은 무혁은 살인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TV의 프레임이 재구성한 이 어이없는 보도를 보며 무혁은 언론에 회의를 느끼고 사직서를 준비합니다. 카메라의 프레임은 좁아졌지만 그 좁은 프레임만으로도 언론은 원하는 현실은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비정한 대사가 등장하죠. ‘세상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 봐무혁의 사표는 끝내 취소되고, 그 역시 현실에 동조할 수밖에 없음을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는 끝까지 언론이 만든 프레임에 대해 생각하게 하네요.


  

아내(이하나)가 자신을 속이고, 진실을 숨긴 것에 대해 무혁은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역시 오보를 진실로 둔갑시켰으며, 그 과정에 수없이 많은 거짓말을 했죠. 그리고 그 거짓 이야기 덕분에 명성을 얻고, 다시 아내에게 돌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내를 탓할 수 없었고, 아이의 유전자 감식 결과도 확인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되니까. 드디어 기자의 의무, 직업 정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합리화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진짜 진실이 드러나지 않아도 세상은 무던히 잘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그는 꼰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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